나의 생각은 자기 맘대로 자기가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정해놓는다. 그 기준이란 것이 파헤쳐볼수록 모호하고 제멋대로다.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정말 아는 것일까? 아니면 모르는 것일까?
앎
어떤 면에서 나의 생각이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익숙한 것, 그리고 편안한 것을 아는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불편한 것, 무서운 것은 모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불편한 것, 무서운 것, 두려워하는 것이 내가 정말 모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나는 그것을 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무섭고, 두렵다는 느낌이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예를 들어 죽음 또는 끝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두려운 감정이 든다. 하지만 죽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죽음이 어떤 현상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다. 그 현상에 대한 인상으로, 살아오면서 들어온 여러 가지 말과 생각들로 당신은 죽음을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이 죽음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현상에 대한 인상을 보는 것이다.
우리는 모르는 것은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존재조차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든,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든 모두 다 결국 내가 아는 것이다. 즉 어떠한 감정, 그것은 내가 아는 것이다. 그리고 감정에 대한 나의 생각이 어떠하든 그것은 나이다. 또한 나의 모든 경험의 총합이 나다.
따라서 지금 현재 처해있는 상황에서 문제라고 바라보는 어떤 것은 그 해결책과 함께 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들여다 볼 때 그 문제 안에 이미 해결책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문제가 지속되는 이유는 내가 이미 알고있는 그 해결책을 그저 단순히 하고싶지 않은 것 일수도 있다. 귀찮아서, 또는 불편한 감정이 들어서 등등의 다른 이유로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문제를 문제라고 여기는 것을 지속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면에서는 나는 그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를 밀가루인형을 만지듯 계속해서 생각으로, 마음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 문제를 지속할 것인가? 해결할 것인가? 그것은 나의 선택이다.
앎을 넘어서
반면,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제일 먼저 우리가 아는 것부터 안다고 생각한 것이 맞는지부터 출발해야한다. 나의 현재를 나는 오롯이 느끼고 함께하고 있는가? 현재 상황의 불만이 왜 불만인지 어디가 불만인지, 그리고 왜 그러한 감정이 드는지, 그 감정의 구체적인 느낌은 어떠한지 아는가?
대학교 재학시절, 불교철학을 교양으로 수강한 적 있다. 그때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물어보셨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일까? 아니면 보는만큼 아는 것일까?”
그때 내가 앞자리에서 앉아 “아는만큼 보인다.”라고 답했다.
교수님이 그 말을 듣고 “그렇지! 아는만큼만 우리는 본다, 보는만큼 안다고 생각하는건 착각하는 것이다. 얘는 아는만큼만 보인다는걸 느낀거야.” 라고 말하셨던 기억이 있다.
그때 내가 생각했던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말과 다르다. 그땐 그 뜻의 표면만 표현한 느낌이라면, 지금 이 말은 깊이가 다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도 다르다. 그때의 기억에서 지금의 나를 보자니 새삼스럽다.
실로, 지금 내 현재가 내 앎의 전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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