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참, 묘하다.
내안에 어떤 감정, 생각이든 분별없이 마주하고, 공감해주고 알아차리면 그 이후 그것들이 변해간다는 것을 알겠다. 알지만 어떤 감정은 허용이 되지만 어떤 감정은 허용이 잘 안 된다.
또, 어떤 생각은 허용이 되지만, 어떤 생각은 허용이 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싫다.
나에게 최근 찾아온 슬픔이란 감정이 그랬다. 학창시절 겪었던 우울과는 다르지만 이 슬픔이 지긋지긋했다. 그냥 싫었다. 그 감정이 올라오면 자동으로 싫었다. 이렇게 싫어한다는 것조차 알아차리기까지 참 오래걸렸다.
최근에 다녀온 건봉사 스님께선 습 때문이라 하셨다. 업과 습 때문에 분별심을 놓아버리기가 어렵다고. 그 말씀이 무엇인지 알 것같기도 하다. 분별없이 바라본다는 것, 이 단순한 것을 실천하기가 참 어렵다.
또한 현재에 머무른다는 것도 실천하기가 참 어렵다. 생각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피어나고 나를 그 생각에게로 끌고 간다. 밥을 먹으면서도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약속장소에 가면서도 집을 나서기 전 가족과 있었던 일을 생각한다. 명상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피어나는 생각들에 끌려다닌다. 끌려다니다가 알아차리고 다시 머물다가 다시 또 끌려다니고,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바람이 이리불면 이방향으로 가고, 저리불면 저방향으로 간다.
힘들고 괴로울 때일수록 이런 상황에 처한 나, 그리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 또 이 모든 것들에 파생되는 생각들이 싫기 때문에, 힘들고 괴롭다는걸 알겠다. 그리고 그때가 그 어느때보다 스스로에게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내밀 때라는 것을 이제 알겠다. 그 무엇보다도 이런 상황을 만든 자신이 싫기 때문에 우리는 힘들고 괴로울때일수록 나를 더더욱 괴롭히고, 비난한다.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그렇기에 더 괴롭다. 누구 탓이라도 하고싶은 마음에 책임을 돌린다. 하지만 기분이 나아지진 않는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 처해있는 나를 용서하고 나 자신을 도와야만 기분이 나아질 수 있다. 바꿔말하면 슬픔, 좌절 등의 감정 또는 상황에 처해있는 그 느낌, 또는 생각에게 스스로 사랑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나 자신을 돕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 찾아온 슬픔을 통해서 나는 내가 또 배우고, 좀 더 나아졌음을 느낀다. 무엇보다 슬픈 상황에 비관하며 머무르려고 하지 않았다. 슬퍼하는 나에게 좋은 것, 기쁜 것, 보다 더 나은 것을 해주려고 했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배움과 실천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리고 책을 통해 얻은 지식에 머무르면서 행동에 옮겼을 때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실천이 주저했음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번에 계속 걷고, 한의원을 다녀오고, 한의원 선생님이 추천해 주신 건봉사를 다녀오면서 행동에 옮긴 것 그 자체의 행위에 배움의 가치를 알게 됐다. 내가 행동에 옮겼을 때 이미 그 행동으로 인해 배우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행동하기 전의 나와 행동하고 난 후의 나는 이미 다른 사람이다. 그리고 이 순간 난 보다 더 나아졌다. 그렇게 계속해서 나아졌다는 것을 알겠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다 경이롭고 사랑스럽다.
'Every Sunday and NO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앎과 모름의 경계 (0) | 2021.05.16 |
---|---|
2021.05.09 (0) | 2021.05.09 |
현재에 머무른다는 것 (0) | 2021.04.25 |
그대에게 가는길2 (0) | 2021.04.18 |
그대에게 가는 길 1 (0) | 2021.04.11 |